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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일기_붉은 설사를 하다 상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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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일기_붉은 설사를 하다
작성자 이승훈 작성일 2010-02-05
조회수 13764 추천수 6
 


철록어미의 금연 에세이16

        -붉은 설사를 하다



허물을 벗는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뱀의 긴 탈피(脫皮)나 등이 갈라져 돋치는 우화(羽化)처럼 단 한 번 끝나는 허물이 아니다. 날마다 이어지는 허물벗기, 몸짓은 요란하지만 벗어낸 허물은 느낄 듯 말 듯할 뿐이다.

야근을 하느라 사무실에서 맞이한 아침이 볼썽사납다. 또 한 번의 허물을 벗기 위한 고통인가, 일어나자마자 또 줄줄 설사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몸의 노폐물들이 이처럼 빠져버린다면 짜릿한 쾌감을 느낄 일이다. 아무리 금단현상이라지만 설사가 오래 이어져 적이 염려스럽다. 사흘 동안 줄기차게 설사를 해댔으니 약국에라도 한 번 가봤어야 한다. 몸은 탈진하듯 축 늘어졌으면서도 금연한다는 사실이 오죽 뿌듯하였으면 설사병조차 금단현상으로 여겨 무지하게 견디려 하였을까.

아침부터 컨디션이나 기분도 까끄름하다. 지난밤 잠자리가 뒤숭숭하게 들먹인 탓이요, 된통 몸살을 앓은 듯한 후유증이 남아 있어서다. 적당히 정신을 추슬러 사무실 옆 럭비운동장으로 나갔다.

담배 니코틴은 흡연자의 몸을 분재로 만든다. 내 몸에서도 30여 년 쌓인 니코틴이 모든 혈과 맥을 짓누르고 있을 듯하다. 담뱃진에 찌들어 분재처럼 꼬인 몸은, 금연 며칠 전부터 운동을 통해 풀어주어야 금단현상이 줄어든다. 매일 운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금연이야말로 사전 운동이 필요하다. 이는 평소 운동량이 부족한 내가 절실하게 느끼는 부분이다. 흡연으로 가장 고통받는 장기가 폐라면, 흡연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폐활량이 짧다. 따라서 금연하기 전 폐활량을 높여주어야 그만큼 금단현상은 덜 겪게 될 것이다.

운동장을 가볍게 달리다가 걷다가 몇 번 한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내일부터는 다소 숨이 차도록 달리기를 해볼 요량이다. 지금의 내 폐는 폐도 아닌 것이 거의 환자 수준이어서 20미터만 달려도 숨이 찬다. 거기다가 나는 지금 오십견을 혹독하게 앓는 중이다. 맨몸으로 걸어도 어깻죽지가 몹시 아파 계단을 오를 때면 잠시 쉬어갈 처지다. 책이라도 한 권 든 날이면 숨 막힐 듯 어깨 통증이 심해진다.

금단현상을 겪느라 여전히 몸살이다. 수십 년 동안 담뱃진이 짓눌러 온 잔병까지 다 드러난 기분이다. 그래도 든손에야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나이 오십 하나, 이루지 못한 꿈을 정리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요, 영혼이 교감하는 완숙한 경지의 사랑도 할 나이가 아닌가. 이제 금연을 통해 지금껏 굴해 온 삶의 완습(頑習)을 벗고, 까맣게 잊힌 미물(美物)을 되찾듯 새로운 삶의 희열을 기대한다. 이제껏 삶이 환속적이라면 지금부터는 탈속적인 삶을 좇아도 좋으리라.

나는 재떨이가 없으면 종종 소주병이나 드링크제 병에다 꽁초를 구겨 넣기도 하였다. 어제 속이 보깨어 동료에게 소화제 한 병을 얻어 마신 후 빈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병을 보니 담배 인이 또 들솟는다. 몸이 저릿하여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의 화분을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다가 그만 일어서는 순간, 강도 높은 기립성 저혈압이 몰려왔다. 나는 5층 발코니 난간을 붙든 채 현기증에 희뜩거리며 잠깐 요동을 쳤다. 눈앞이 희끗거리는 가운데 발작을 일으킨 환자처럼 힘이 풀린 두 다리가 계속 경련을 일으킨다고 느꼈다. 만일 난간을 붙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어디에다 머리를 부딪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비틀거리는 몇 초 동안 정신을 완전히 잃었던 거 같다. 만일 산행에서 높은 바위에 앉았다가 일어서며 기립성 빈혈을 맞았다면 나는 어찌 될 것인가. 병원을 가야 하나, 아침부터 심각해진다. 어릴 때부터 겪은 빈혈이라 가볍게 받아들였으나 요즘 금단현상과 맞물리니 조금 불안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도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려는 몸짓이려니 한다. 이처럼 내 몸의 모든 이상 징후는 금연으로 통하는 중이다.

점심을 먹고서 또 설사기를 느껴 화장실로 향했다.

물을 내리면서 무심결에 변기를 들여다본 나는 기겁을 하였다. 변기 안이 온통 붉은 피로 가득한 것이다. 하얀 변기 안에서 붉은 피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설사의 심각함을 깨달아 동료에게 병원을 다녀온다며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병원으로 가기는 싫었다. 의사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괜히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것저것 검사하자 할까 봐서다. 대신 찾아간 약국 약사에게 설사가 좀 심하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으나 장이 나빠 그럴 거라며 ‘아무 일 없는 하루’처럼 약을 건넨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안심되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 온수역에서 내리니 건너편 승강장에 ‘금연구역’이라는 자그마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전철의 모든 역은 지금 당연히 금연 구역이 아닌가 하면서도 그 문구가 왠지 가소롭다. 붉은 피는 까맣게 잊은 채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다.

오후 늦게 지인의 손자인 네 살 하진이가 사무실로 놀러 나왔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아이, 꽃보다 예쁘다. 예전에는 담배 냄새가 아이에게 해가 될까 봐 쉽게 안아볼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일조차 미안한 일이었다. 아이도 내가 담배를 안 피우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낯가림이 심한 녀석이 스스럼없이 안긴다.

잠들기 전까지 혈변은 계속 이어졌다. 훗날 ‘피똥을 싸면서 담배를 끊었다.’는 기록이 나에게 남을 것이다. 설사약 효과는 별로 없어 보이지만 약간 다른 징후가 보이긴 했다. 온종일 속도 쓰려 겔포스를 사서 마셨다. 온종일 소화불량, 온종일 설사, 온종일 혈변, 온종일 기립성 빈혈, 온종일 무기력증연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금단현상이 심할수록 담배에 대한 혐오도 큰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울 때보다 담배를 끊어갈 때 담배의 폐해를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2010-02-05 금연 225일째


출처: http://cafe.daum.net/w1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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