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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및 비법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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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억을 찾아서 상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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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억을 찾아서
작성자 김무승 작성일 2008-12-01
조회수 2187 추천수 0

오늘 잠시 가슴답답함과 두통, 우울이 약하게 왔다. 이제 70일이 다 되가니 금단증상은 어느정도 벗어낫으려니 했는데 이런 증상을 약하게나마 느끼면서 약간의 실망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다. 금연시작한지 처음 한 달 동안 금단증상이 무척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증상은 이제 그만 졸업하고 싶은데 또 느끼게되는 것같아서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고 자신이 없어지는 것같았다. 특히나 우울함은 몹시 불쾌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을 물리치기위해 이런저런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며 한마디로 정신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에 묻어나는 기분이 되살아났다. 뭔가에 자극받아서 문득 어떤 시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껴보는 일은 누구나 경험해보는 일일 것이다. 이런 마음의 움직임을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프랑스의 작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에서 섬세하게 묘사한 일이 있다. 어떤 맛이, 혹은 어떤 냄새가 문득 오랫동안 잊고지냈던 시간과 공간으로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다.

 

나에게 떠오른 것은 주말마다 방영해주던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토요일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언제나 기다리는 날이고 설레이는 날이었다. 그 설레임의 절정은 시간맞춰 TV 앞에 앉아서 그 유명한 도입부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토요명화가 시작되기전 도입부 음악이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 음악은 아직도 나에게 설레임을 불러온다. 나는 토요일이면 내가 사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여행가는 것같은 기대감을 갖고 토요명화를 기다리곤했다. 영화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사랑, 슬픔, 환희, 비극, 액션....  어떤 영화는 내가 이 세계와 삶에서 무엇을 바라는지 결정한 듯하다. 영화를 통해서 나는 내가 살고싶은 삶을 상상했고 행복의 이미지를 갖게되었다.

 

토요명화가 토요일 특유의 설레임과 기대감의 절정이었다면 명화극장은 일요일이면 내가 느끼곤했던 절망감, 더 심하게는 말세감에서 벗어나기위한 구급약이었다. 나는 일요일엔 늘 우울하곤 했다. 다음날 학교가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월요일 학교가는 기분은 비교할 것을 찾는다면 한참후에나 경험하게된 휴가 후 부대복귀할 때의 참담함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 월요일을 하룻밤 남겨두고 있는 일요일은 아무리 노는 날이라도 즐거울 수 없었다. 하루종일 해가 뜨고 기우는 것에 조마조마한 마음이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나는 희망이, 일주일을 견딜 희망이 절실해지곤했다. 그런 마지막 희망이 되어준 것이 명화극장이었다. 정말 멋진, 가슴을 적시는 감동을 주는 영화를 본다면 나는 삶의 갖은 희노애락을 맛보고는 월요일의 절망감뿐만 아니라 한 주일의 고단함을 넘어 삶의 장구한 아름다움을 내다보는 달관의 지혜를 얻은 기분이 되곤했다. 그러고서야 나는 잠들 수 있었다.

 

서정주는 자기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했다지만 나의 감수성과 취향을 키운 것은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이다. 거기서 사랑과 낭만을 느끼면 그것이 사랑과 낭만이 되었고 거기서 행복을 보면 그것이 행복이었다.  어쩌면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을 통해 접했던 명화들보다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보기전의 기다림과 보고나서의 여운인지 모른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아직도 기다리는 행복이 뭔지는 몰라도 바로 이것이 행복이구나하고 알아볼 때는 같은 기다림과 여운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전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이 불러일으키던 그 행복감을 느끼기는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지는 것같다. 그건 현실을 더 많이 알게돼서일까, 아니면 몰입을 방해하는 생각이 많아져서일까? 어쩌면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람은 어릴때는 무모한 상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뭐가 무모한지 모르기때문이다. 이제는 상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검열을 하는 것같다. 현실적인지를 따져보면서 상상하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뭐가 현실적인가", "가능한 현실이 뭔가"를 물어보면 늘 생각하는 현실은 체념과 순응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의 범위는 체념하고 순응할 수 있는 데까지 일것이다.

 

체념하고 순응하는 것은 어감만으로도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누가 기꺼이 체념하고 순응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사는 일은 어떤 면에서 소망의 좌절에 적응해가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꿈꾸는 일에서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누가 죽으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는 열정을 갖고 살았는가?" 만약 망자가 생전에 열정을 갖고 살았다면 그는 삶을 허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열정이 없었다면 그는 이미 죽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꿈과 열정은 살아있음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고 "철이 든다"는 것은 체념하고 순응할 줄 알게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열정을 갖고 꿈을 꾸어야 참으로 사는 것이면서도 체념과 순응을 배우지 않고는 철들고 어른이 되지못한다는 것은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만족의 상태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감당해야하는 수난의 과정임을 시사한다. 열정을 뜻하는 Passion은 동시에 수난을 뜻하기도 하다는 것은 음미해볼만한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금연과 무슨 관계일지는 모호할 수도 있다. 나는 행복을 기억하고 싶었고 그 기억을 더듬다보니 열정과 수난이 가진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에까지 생각이 이른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이제 자도될 것같다. 모두 곤히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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